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니체 (문단 편집) == 생애 ==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프로이센 왕국]]의 뢰켄에서 태어났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생일이 똑같다는 이유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다만, 니체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생일에 태어났다. 이 때문에 나에게는 한없는 슬픔을 안겨준 사건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나에게 '프리드리히' 라는 이름을 안겨준 일이다.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면 생일이 휴일이었다는 점뿐이다." 니체는 프로이센 특유의 권위주의 문화를 끔찍하게 여겼기 때문에 프로이센 왕가에 대한 감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니체의 가정사는 좀 불운했다. 어려서 그는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와 역시 목사 집안 출신이었던 어머니, 여동생 엘리자베스, 어린 남동생 요제프, 할머니, 미혼인 두 고모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니체가 5살 때 뇌연화증으로 죽었고, 몇 달 후 동생 요제프까지 병으로 사망했다. 이 두 죽음은 니체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아버지의 죽음을 니체는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다. 니체가 알기로 그의 아버지는 매우 지적이면서, 열정적이고, 가볍기도한 니체 본인과 똑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의 집안 여성들은 하나같이 매우 진지하고, 무겁고, 절제하며, 엄격한 전형적인 북독일 루터교인이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자라다 보니 니체는 마음대로 생각할 자유로움이 없었다며 강한 원망을 품었다. 이러한 경험은 니체의 철학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니체는 10세 때 모테트(Motette, 성서 구절을 다성적으로 다룬 무반주 악곡)를 작곡하는 등 10대 시절부터 짧게 작곡 활동을 했다. "음악이 없는 삶이란 잘못된 것이다"라는 얘기까지 했다. 안타깝게도 청년 시절 이후부터는 본업인 저술에 몰두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작곡에 할애하지는 않았지만, 바쁜 와중에도 오페라나 오케스트라곡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음악 스타일은 [[슈만]]과 흡사했다. 많지는 않지만 음반으로도 발매되었다. 청년이 된 니체는 1864년, 본 대학교에 진학해 신학과 [[그리스]] 고전 문헌학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본 대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기게 된다. 2학기가 지난 1869년, 학생 신분이었던 그는, 불과 24세의 나이에 당시 고전문헌학의 권위자이자 지도교수였던 리츨(F. W. Ritschl)의 추천으로 [[바젤 대학교]] 문헌학 교수가 되었는데, 심지어 이때의 니체에게는 아무런 학위도 없었다. 바젤 대학교는 이례적으로 학위 논문 심사를 거치지도 않고 라이프치히 대학을 통해 니체에게 박사 학위를 주었고, 바로 한 달 뒤 니체는 바젤 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 교수로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니체는 그 대학의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바젤 대학교 문서에 따르면, 리츨 교수의 추천과 니체의 문헌학에 대한 특출난 재능 때문에 이러한 이례적인 결단이 내려졌다고 한다. 리츨 교수는 니체를 가리켜 "내가 강단에서 학생들을 기르쳐 본 이래로 이토록 고전문헌학에 특출난 재능을 가진 학생을 본 적이 없다."라고 탄복하며, 니체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가 [[바젤 대학교]] 교수가 되면서부터 니체는 인근에 거주하던 [[리하르트 바그너]]와 깊은 친분을 맺으며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바그너와 니체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토론으로 날을 지새우기도 했다.[* 니체는 젊은 시절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하여 읽었는데 이를 계기로 철학을 파고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바그너와의 교류는 그가 문헌학자에서 철학자로 전환하게 된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그를 고전문헌학자로 대성시키려던 스승 리츨과 갈등이 생기게 되고, 결별하기에 이른다. 또한 니체는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깊게 반영하여 작곡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크게 감복한다. 니체는 1870년부터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구상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발전시켜 1872년 "비극의 탄생"을 완성했다. 그는 이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에게 헌정했다. 1870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의무병]]으로 종군했다. 그러나 병으로 귀환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병에 시달렸다. 다만 이때 얻은 병 때문에 니체는 보다 치열하게 고민을 할 수가 있었고, 니체 본인도 자신의 병환을 하나의 축복으로 여기는 태도를 보였다. 1870년대 중반 즈음에 바그너가 점차 데카당스, [[독일 제국]]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여긴 니체는 1876년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보고 회의를 더해갔다. 니체는 사실상 이때부터 바그너와 정신적으로 결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그너 부부에게 부모와도 같은 정을 느꼈던 니체는 결별 선언을 미루었다. 결국 1882년 바그너 최후의 작품인 [[파르지팔]]을 보고 니체는 바그너가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여기고,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던 바그너 부부를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하며 결별을 선언한다. 1879년 건강 악화로 교수직을 사임했다. 이후 10년간 유럽을 떠돌며 자신의 주요 작품을 집필했다. 그는 1889년 1월 3일[* 그의 마지막 저작인 '디오니소스 송가' 집필을 끝마쳤을 시기다]을 기점으로 정신이 나갔는데, 마부에게 채찍질당하는 말을 보고는 울면서 그 말을 감싸안다가 넘어졌다.[* 이를 보고 니체가 '[[죄와 벌]]'을 읽고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에 매료되어 한 무의식적 행동이라고도 한다. 작중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학대받는 말을 동정하여 감싸안는 꿈을 꾼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니체는 이 시점부터 정신이 나간 건 맞다.] 이날 작성된 편지[* "나는 인도에서는 붓다였고, 그리스에선 디오니소스였습니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는 나의 현현이며 셰익스피어와 바콘 경도 그와 한가지입니다. 근래의 나는 볼테르였으며 나폴레옹이었고 어쩌면 리하르트 바그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무적의 디오니소스이며 지상에 축제를 불러오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체는 니체에게 있어서 매우 일상적인(?) 문체('이 사람을 보라'를 읽어보면 대충 알 수 있다)였기 때문에 단순히 니체가 미쳤다고만 하기는 어렵다. 물론 말년에는 확실히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긴 했다.]를 보면 그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날은 니체가 제정신을 가진 마지막 날로 사실상 그의 기일이다. 그의 정신착란을 두고 한때 [[매독]]이 원인이라고 주장했었던 때가 있었다.[* 니체의 매독설은 1947년 니체 비평가인 빌헬름 랑에-아이히바움이 "니체가 학생 때 라이프치히의 한 창녀로부터 성병에 걸렸다는 말을 베를린의 한 신경학자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밝힌 데서 비롯되었다. 이 책에 나오는 한 문장이 니체가 매독에 걸렸다는 근거로 추후 여러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인용되면서 매독설이 확산됐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의학적 고찰을 통해 나온 많은 논문에서, [[뇌종양]]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7000000/2003/05/007000000200305050949173.html|출처]] [[http://www.telegraph.co.uk/education/3313279/Madness-of-Nietzsche-was-cancer-not-syphilis.html|원문]]] 말년엔 정신 발작으로 몸과 마음이 더 쇠약해져 10년 동안 부모님과 여동생의 보살핌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속설에 '[[식분증|식분증]]' 증세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뇌종양으로 인한 마비가 왔다면 움직이지 못하는데 식분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이에 대한 것은 자세한 레퍼런스가 필요하다.] 그 뒤 병이 악화되어 1900년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니체는 평생 독신이었다. 1882년 친구의 소개로 [[루 살로메]]라는 지적인 여자와 친분을 맺고 청혼했으나 차였다. 그녀는 그저 니체의 철학을 사랑했을 뿐이었다. 루 살로메의 회고에 의하면 니체는 자신보다 17살이나 연상이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